반달가면 이글루에서 백업 - http://bahndal.egloos.com/607816 (2017.11.27)
사실 이 세상에 열등감이 없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세상이 완벽하지 못하고, 부모와 형제가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에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마음의 상처를 지니게 된다. 다만, 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열등감의 존재를 인정하고 직시하느냐, 아니면 열등감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거나 마치 자신에겐 없는 척 숨기면서 막상 그 열등감을 자극하는 사건이 생길 때마다 거품을 물고 펄펄 뛰며 분노하느냐, 그런 차이가 있을 뿐이다.
여기에 써 보는 갑돌이의 이야기는, 일부는 나 자신에 대한 고백이고 일부는 주변에 있던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한 결과다.
분노하는 갑돌이의 사례
갑돌이는 자신의 열등감을 인정하지 못했다. 아니, 아예 그런 쪽으로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대학 가려고 시험공부하기도 바쁜데 자신의 마음에 대해 돌아볼 여유는 사치였다.
그래도 밤낮으로 공부한 보람이 있어, 갑돌이는 대학에 들어갔다. 공과대학이라서 한 학기에 과목당 시험을 최소한 세번씩 봐야 하고 숙제도 많고 학점도 짜게 주는 것이 문제였지만 그래도 입시준비하던 고등학교 생활에 비하면 낙원이라고 해야 할 만했다. 늦잠도 마음대로 잘 수 있었고,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워도, 가끔 수업을 제끼고 학교 잔디밭에서 빈둥거려도 누구 하나 간섭하지 않았다. 이 얼마나 자유로운 인생인가!
그런데도 갑돌이는 삶이 괴로웠다. 자신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이 생길 때마다, 그러한 일이 벌어지는 환경과 그 환경 속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 분노했기 때문이다. 갑돌이는 자신이 착하고 괜찮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이 속속들이 썪어 있는 부조리한 곳이기 때문에 이런 괴로움과 분노를 지니고 살게 되었다고 여겼다. 이 부조리한 세상에서 자신과 달리 즐겁게 사는 사람들, 소위 잘 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짜증이 치밀었다.
어쨌든 그런 식으로 살던 중에, 열등감과 피해의식을 마음대로 분출할 수 있게 만드는 굉장한 마약을 만나게 되었다. 마음속에 담긴 화를 어디든 쏟아붓고 싶어 혈안이 되어 있던 갑돌이에게 어둠속 한줄기 빛 내지는 가뭄끝의 단비 같은 눈부신 단어가 나타났으니, 그것은 바로 "정의(正義)"다.
"정의의 이름으로 저 자들을 처단하라!" 이 얼마나 달콤한 명제인가! 아무런 죄책감 없이 이렇게 남을 괴롭히고 파괴할 수 있는 마법의 문장이 존재할 줄이야! 사안에 따라 표현과 내용은 각양각색이지만 내재되어 있는 명제는 언제나 동일했다. "정의의 이름으로 저 자들을 처단하라!"
어디 그뿐인가? 막상 "정의"의 편에 서고 보니, 주변에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며 이를 갈고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더라는 것이다. 여태껏 이걸 왜 몰랐을까? 갑돌이는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증오와 분노가 불의에 맞서 투쟁하기 위한 성스럽고 위대한 감정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오오 동지들이여!
정의라는 단어는 얼마나 위대한가! 갑돌이는 소위 "불의의 편에 서 있는 자들"에 대한 욕설과 비방과 폭력을 행하면서도 죄책감은 고사하고 오히려 신세계가 열리는 듯한 해방감을 경험했다. 자신이 그동안 왜 그렇게 괴로워 하면서 분노를 키우며 살아왔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바로 저들이 세상을 망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정의의 편에 서서 동지들과 함께 당당하게 앞으로 나선 갑돌이는 말싸움에서도 천하무적이었다. "너희들의 주장은 비현실적이고 실현되면 오히려 수많은 해악을 가져온다"고 말하는 자들에게 떼거리로 달려 들어 "부조리로 얼룩진 현실에 아첨하는 속물근성의 쓰레기들"이라고 윽박지르며 욕을 한바가지 해주면 된다. "너희들과 의논하며 해답을 찾을 이유가 없다. 너희는 불의의 편에 있으니까!" 이러면서 아예 논의 자체를 거절하며 줄기차게 욕을 해대면 상대는 결국 입을 다물고 피해 버렸다. 그때의 그 우월감! 승리감! 그래, 바로 이거였어!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삶의 의미! 인생의 소명! 바로 이것이로구나! 저들을 괴롭힐 수만 있다면, 비열한 거짓말과 속임수조차 성스럽고 위대해 보였다. 왜냐고? 저들은 정정당당하게 대우해 줄 가치조차 없는 쓰레기들이니까!
그렇다고 인생이 엄청나게 행복해진 것은 아니고, 사실은 여전히 분노와 증오에 휩싸여 살고 있었다. 하지만 불의의 세력을 짓밟고 괴롭히는 그 순간의 짜릿함은 도저히 끊을 수 없는 마약과 같았기에, 갑돌이는 드디어 삶의 방향을 제대로 잡았다고 굳게 믿었다. 이 세상은 단순한 대결구도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상호의존성 투성이라는 증거들은 "현실과 타협하지 않겠다"고 되뇌이며 애써 외면했다.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서도 그렇게 분노의 감정을 활활 불태워가면서 확신에 찬 인생을 살던 갑돌이가 자신의 가치관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한 것은 강아지 한마리를 키우면서 부터다. 어쩌다 보니 강아지를 맡아 키울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는데, 귀찮을 것 같긴 했지만 강아지가 나름 귀여워 보이기도 해서 별 생각 없이 일단 키워 보기로 했다.
갑돌이는 강아지를 키우면서 자신의 행동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챘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갑돌이는 강아지에게까지도 분노와 증오를 분출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화를 내던 어느 순간에 문득 자기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를 관찰해 보니 참으로 놀라운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매일 괴롭힌 것은 아니다. 잘해줄 때도 많았다. 그런데 뭔가 강아지가 말을 안 듣거나 하면, 희한하게도 불의의 세력을 단죄할 때와 동일한 종류의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이런 상황을 가끔씩 인지할 때마다 마음 한구석에서 뭔가 찜찜한 느낌이 있기는 했지만, 왜 이런 일이 생기는지 그 원인이 분명하게 떠오르지도 않았고 조금 지나면 잊어버리고 했기 때문에 강아지를 대하는 행동양식을 고치지는 못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언제부터인가 강아지는 갑돌이를 슬슬 피하고 있었다.
어느날, 갑돌이는 생각에 잠겼다. 강아지는 불의의 세력에 속해 있는가? 아니다. 말 못하는 동물이니 정의나 불의를 논할 대상이 아니다. 그런데 왜 나는 이렇게 분노하고 있는가? 강아지가 구체적으로 무슨 잘못을 했기에 나는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가?
이 문제는 꽤 오랫동안 갑돌이를 괴롭혔는데, 한참을 고민하던 끝에 갑돌이가 내린 결론은 아래와 같다.
내가 그토록 분노했던 이유는 세상이 부조리했기 때문이 아니라 열등감과 피해의식에 절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순진하고 세상 모르던 어린 시절에 부모와 형제와 친구들로부터 부당한 대접을 받거나 괴롭힘을 당하면서 쌓인 억울한 감정이 아직도 여전히 마음속에 그대로 쌓여 있었다. 나는 이들에게 의존해서 살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또는 보복이 두려웠기 때문에 이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거나 맞서 싸우지 못하고 그냥 꾹 참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그냥 참을 수밖에 없는 나약한 자신이 한심하고 혐오스러웠고 그래서 너무나 화가 났다. 이런 상처들이 모여 열등감이 되고 피해의식이 되어 어느새 마음속에 자리를 잡았다. 겉으로는 자신의 분노가 더 나은 세상,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위대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강변해 왔지만 사실은 개인적인 열등감과 피해의식이 이 모든 분노의 원천이었다.
갑돌이는 이렇게 결론내렸다. "내가 그렇게까지 분노했던 이유는, 세상이 부조리했기 때문이 아니라, 어린 시절의 상처들 때문에 이미 처음부터 화가 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을 담담하게 인정하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이걸 인정하면 마치 내가 그만큼 못난 사람임을 자인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걸 인정해 버리면, 그동안 "불의에 맞선 투쟁"이라는 이름으로 아무런 거리낌이나 죄책감 없이 자행해 왔던 비난과 폭력이 다 잘못이라는 얘기가 된다. 한마디로 그동안 인생을 잘못 살았다고 인정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 말이 쉽지 대체 어떻게 이런 것을 인정한단 말이냐!
마음의 갈피를 못 잡고 혼란에 빠진 나날들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세상의 부조리함"이 주는 괴로움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운 괴로움이 찾아왔다. 그냥 예전으로 다시 돌아가서 더 이상 이런 문제는 생각을 말아 버리자고 다짐해 보기도 하고, 저 망할 강아지만 아니었어도 이런 괴로움은 없었을 것이라면서 모든 것을 강아지 탓으로 돌려 보기도 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알 수 없는 이상한 자괴감만 커졌다. 입맛도 떨어지고 잠도 깊이 못자는 날이 늘었다. 예전보다 몸무게도 줄었다.
그러던 어느날, 갑돌이는 강아지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해 주었다. "멍멍아. 지금까지 내가 너에게 화를 내고 괴롭혔던 이유는 네가 잘못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이미 화가 나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었어. 너의 잘못이 아니야. 그동안 내가 너무 큰 잘못을 했다. 미안해."
갑돌이가 열등감을 완전히 극복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최소한 정의의 이름으로 남을 괴롭히는 행위는 그만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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