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달가면 이글루에서 백업 - http://bahndal.egloos.com/634900 (2020.2.8)

지금 여기에 쓰는 글은 개인적으로 경험하고 주변을 관찰한 결과이므로, 전체가 다 이렇다고 일반화하기엔 무리가 있다. 그러나 어쨌든 이론이나 상상이 아니라 실제 사례를 보면서 생각하고 느낀 바를 적은 것이므로 완전히 무시할 수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아래와 같은 상황을 한번 생각해 보자.

어떤 유명 대학병원의 의사가 있다. 진료도 하고 수술도 한다. 매일 새벽에 출근해서 바쁘게 일하다가 밤늦게 퇴근한다. 이 의사가 받는 업무 스트레스는 얼마나 클까? 꽤 크다. 의사라는 직업은 그냥 적당히 할랑하게 놀면서 빈둥대는 직업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의사가 그만두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당연히 돈을 벌어야 먹고 살 수 있고 의사를 하면 돈을 꽤 많이 벌기 때문에 그만두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의사는 이미 집안이 워낙 부유해서 굳이 의사를 하지 않아도 평생 먹고 놀면서 편하게 살 수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옳다구나 하면서 그만둘까? 대학병원의 의사들은 전부 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서 오로지 먹고 살기 위해 의사를 하고 있나?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대체 왜 그러고 있는 것인가?

이 세상이 필요로 하는 모든 종류의 일은, 특히 중요하고 어려운 일일수록 그 일을 하는 과정에서 커다란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스트레스를 감내해 가면서 그 일을 한다. 생계 때문이라면 당연하다. 그런데 생계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람들 중에도 이걸 다 감내하면서 일을 하는 경우가 꽤나 많다. 왜 그런가?

한편, 업무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힘들어하다가 사표를 낼 결심을 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얘기가 있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고생하면서 이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이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생존을 위한 경제적 필요성을 제외하고, 저 의사가 사표를 내지 않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그 일이 자신에게 "중요"하고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내가 하는 일은 필요하고 중요하므로 이 일을 하는 과정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충분히 감내할 가치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러한 믿음은 자기 자신의 가치관과 주변 사람들의 평가가 복합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자, 이제 아이를 키우는 문제를 생각해 보자.

일단 한가지는 분명하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굉장히 어렵고, 큰 스트레스를 받는 종류의 일이다. 아이를 키우는 일이 쉬웠던 적은 없다. 그건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진짜 문제는 양육자가 그 스트레스를 "충분히 감내할 가치가 있다"고 믿고 있느냐다.  

과연 아이를 키우는 일은 얼마나 필요하고 중요한 일인가? 내가 직접 아이를 돌보는 것보다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기고 나는 돈을 벌어오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일인가, 아니면 내가 직접 아이를 키우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일인가?

"직장에서 돈을 버는 것에 비하면 아이를 키우는 일은 상대적으로 하찮고 의미 없는 일인데, 아이가 어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집에서 아이를 키우고 있다." 만약 이런 생각이 들고 있다면, 육아 스트레스는 그야말로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된다. 더 의미 있고 중요한 일을 해야 하는데 어쩔 수 없이 억지로 붙잡혀서 의미가 크지 않으면서 어렵기만 한 일을 하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우울증이 오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인공지능은 학습에 사용된 데이터에 따라 성능이 크게 좌우된다. 실제 인간이 판단한 다양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인간의 판단 기준을 그대로 모방하도록 소프트웨어로 구현한 것이 인공지능이다. 사람은 말할 것도 없다. 아이는 양육자의 모든 말과 행동을 모방하므로, 어떤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양육하느냐에 따라 그 인생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아이를 낳아 키우는 일은 한 사람의 인생을 만드는 일이므로, 엄청나게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다.

아이의 성격과 인생은, 예전에는 대부분 부모, 특히 어머니에 의해 좌우되어 왔지만 이제는 부모가 지불하는 돈을 받는 제3의 양육자들이 좌우하는 비중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듯하다. 만약 그 제3의 양육자가 부모보다 더 훌륭한 인격을 지니고 부모보다 더 아이를 사랑하며 아이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때로는 엄하게 잘못을 지적할 수도 있다면 좋겠지만, 친자식도 제대로 키우기가 어려운데 친자식이 아닌 아이를 그렇게 양육하기란 정말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솔직히 지금까지 살면서 돈 버는 여성을 보면서 진심으로 감탄한 적은 거의 없다. 하지만 예의 바르고 똑똑하고 밝은 아이를 보면 "저 아이의 엄마는 대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일까"하면서 나도 모르게 감탄을 넘어 경외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아이를 저렇게 훌륭한 모습으로 이끌어낼 자신이 없다. 이것이야말로 여성이 발휘할 수 있는 - 그 어떤 남성도, 마블 어벤저스도 흉내낼 수 없는 - 진정한 수퍼파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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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반달가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