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눅스2023. 9. 26. 08:55

 

반달가면 이글루에서 백업 - http://bahndal.egloos.com/658059 (2022.5.30)

 


얼마전에 구입한 ASUS M513UA-L1284 노트북에 Q4OS 4.8을 설치했다. Q4OS는 데비안(Debian) 리눅스로부터 파생된 가벼운 배포판이다. Q4OS 공식 홈페이지는 아래의 링크다.

https://q4os.org

현재 버전은 4.8이고 데비안 11.3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데스크탑 환경은 KDE 플라즈마(KDE Plasma)와 TDE 두가지를 제공하는데, TDE가 더 가볍긴 하지만 가상 머신에 설치해서 시험해 본 결과 한글 입력 설치가 잘 되지 않아서 약간 더 무거운 KDE 플라즈마 버전을 선택. 영문판으로 설치하고 한글 입력을 추가했다.

라이브 세션으로 부팅해서 설치를 진행하면 "Q4OS Desktop", "Q4OS Basic", "Q4OS Live", "Q4OS Pure" 이렇게 4가지중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웹브라우저, 오피스 등 통상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소프트웨어를 포함한 것이 Desktop이고 상당 부분을 제거하고 가볍게 설치하는 것이 Basic인데, Basic으로 선택해서 진행했다.

한글 입력은 ibus를 사용하면 된다. 설치하는 과정은 예전에 정리했던 "리눅스 민트 20 XFCE에서 한글 입력 설치하기"와 사실상 동일하다. 관련 내용은 여기에. 다만, 한글 폰트 등 추가적인 패키지 설치가 필요하다. 아래와 같이 작업했다.

# S/W 저장소 정보 갱신
sudo apt-get update

# 한글입력을 위한 패키지 설치
sudo apt-get install ibus ibus-hangul im-config fonts-nanum fonts-unfonts-core

# ibus 설정 실행
ibus-setup

ibus 설정의 "Input Method" 탭으로 가서 "Add" 버튼을 눌러 "Korean - Hangul" 항목을 추가하고 기존의 항목은 삭제한다. 이후 한글 입력기를 활성화하기 위해 im-config를 실행하고 ibus를 활성화한다.

# 한글 입력기 선택
im-config

다행히 무선랜, 터치패드, 소리 등 주요 기능이 별도의 드라이버 설치 없이 잘 동작했다. 일단 그냥 이대로 사용하면서 필요한 S/W를 설치하면 될 듯. 커널 버전은 5.10이다.

노트북 화면이 OLED 방식인 관계로 데스크탑 테마는 다크 모드로 설정해 주었다. 터미널창에서 systemsettings5를 실행하거나 어플리케이션 메뉴에서 "system settings"를 검색해서 실행한 후에 "Global Theme" 설정을 Breeze에서 Breeze Dark로 변경하고 "Icons" 설정은 기본값인 Breeze Dark보다 We10X가 더 괜찮은 것 같아서 이걸로 선택.

저반사 패널이 아니다 보니 반사되는 것이 영 신경 쓰여서 직접 저반사 필름을 구입해서 붙이려고 시도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필름 부착 능력의 한계를 절감한 후, 힐링쉴드라는 업체에 가서 붙이고 왔다. 필름 때문에 화면의 선명도가 좀 떨어지긴 했지만 그렇게 심하지는 않고, 반사광이 없어서 훨씬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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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반달가면
리눅스2023. 9. 26. 08:51

 

반달가면 이글루에서 백업 - http://bahndal.egloos.com/657894 (2022.5.24)

리눅스에서 텍스트 파일에 저장된 수자들로부터 합, 평균, 표준편차 등을 계산하고 싶을 때 datamash를 활용할 수 있다. 설치는 터미널창에서 아래와 같이 진행한다. 데비안/우분투 기준이다.

# S/W 저장소 정보 갱신
sudo apt-get update

# datamash 설치
sudo apt-get install datamash

예를 들어 과일의 개수를 저장한 fruits.txt 파일의 내용이 아래와 같다고 가정하자.

apple 10
banana 24
grapes 17

첫번째 항목은 명칭이고 두번째 항목은 개수이다. 전체 과일의 개수는 아래와 같이 계산할 수 있다.

# 두번째 항목의 합
cat fruits.txt | datamash sum 2

"sum 2"라고 지정하면 두번째 항목의 합(sum)을 구하라는 뜻이다. 평균은 "mean", 표준편차는 "sstdev"를 사용한다.

# 두번째 항목의 평균
cat fruits.txt | datamash mean 2

# 두번째 항목의 표준편차
cat fruits.txt | datamash sstdev 2

합과 평균을 같이 표시하고 싶다면 아래와 같이 할 수 있다.

cat fruits.txt | datamash sum 2 mean 2

항목 구분자는 기본적으로 탭(tab)인데, 다른 구분자를 사용했을 경우 -t 옵션을 이용해서 지정할 수도 있다.

만약 fruits.txt 파일의 항목 구분자가 탭이 아니라 공백(space)이라면, 아래와 같이 해야 할 것이다.

# 항목 구분자가 탭이 아니라 공백인 경우
cat fruits.txt | datamash -t ' ' sum 2

첫번째 행이 항목 명칭인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fruits.txt 파일의 내용이 아래와 같은 경우다.

name qty
apple 10
banana 24
grapes 17

이 경우에는 계산을 할 때 첫번째 행은 무시해야 하는데, --header-in 옵션을 사용하면 된다.

# 항목 구분자는 공백, 첫번째 행은 계산에서 제외하고 2번째 항목의 합계 계산
cat fruits.txt | datamash -t ' ' --header-in sum 2

그 외에도 뭔가 복잡한 기능들이 많은데, 개인적으로 요긴하게 쓰는 범위는 이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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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반달가면

 

반달가면 이글루에서 백업 - http://bahndal.egloos.com/613403 (2018.4.2)

원문기사는 여기로

대기원시보(the Epoch Times)라는 언론매체에서 조던 피터슨(Jordan Peterson) 토론토 대학 심리학과 교수와의 인터뷰를 다룬 기사다. 주로 미국/캐나다 지역의 문제를 얘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 내용이 짧아서 설명이 불친절한 측면도 있지만, 나 자신의 경험이나 주변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느꼈던 점들과 견주어 보면서 상당히 흥미롭게 읽었기에 여기에 주요 내용을 번역 비슷하게 옮겨 본다.

* * *

서방 세계에서 공산주의는 "공산주의"라고 씌어진 깃발 아래서 퍼져나가지 않았다. 대신, 공산주의는 대부분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이름으로 도입되었으며 그 목적은 "지식과 진실은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막시스트 사상을 통하여 우리 사회의 가치와 신념을 변화하려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치 아래, 회의주의와 불신의 물결이 철학, 문화, 역사 등을 포함해서 서양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모든 신념체계에 적용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 특히 정치적으로 사용될 경우 - 막시즘이 쓰고 있는 탈(가면)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 사회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이해하려면 포스트모더니즘의 역할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포스트모던 철학은 1970년대에 유명세를 얻기 시작했는데, 그 당시에 고전적인 막시즘은 신뢰가 떨어질 대로 떨어져서 광신도가 아니고서야 그 누구도 겉으로 대놓고 막시즘을 지지하지 않았다. 1960년대말에는 프랑스 지식인들조차 공산주의가 나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들은 사람들을 속이기 위한 일종의 술책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포스트모더니즘 뒤에 숨기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가 나왔다. 프랑스에서 들불처럼 번지던 정체성 정치는 예일 대학교 영문학과를 통해 미국으로 들어왔고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막시즘은 자연환경과 경제환경을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의 계급투쟁으로 본다. 막시즘은 경제체제가 사람들을 노예화하며 노예상태를 유지하려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 공산주의는 반복적으로 더 악화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증명했다. 20세기에 세계 곳곳에서 실현된 공산주의는 끔찍한 살육을 야기했다. 공산주의는 인류가 지금까지 고안한 경제/정치사상중 가장 파괴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심지어 아돌프 히틀러를 능가하여 1세기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1억명이 넘는 사람이 살해당하게 된다.

공산주의가 야기한 대참사는 학교에서 거의 다루어지지 않는다. 대다수의 학생들은 1919년에서 1959년 사이에 레닌과 스탈린 치하의 소련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모른다. 수백만, 수천만명이 죽임을 당했으며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고문을 당하고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다는 사실을 모른다. 모택동은 말할 것도 없다.

1960년대말, 장-폴 사르트르 같은 지식인도 공산주의 실험이 - 막시즘, 스탈린주의, 모택동주의, 그밖의 변종들이 - 최악의 실패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공산주의를 포기하는 대신 이름만 새로 바꿨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의 계급투쟁 대신에 압제자(the oppressor)와 피해자(the oppressed)의 계급투쟁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어떤 집단이라도 압제자와 피해자 구도로 간주한 후 이름만 다를 뿐 공산주의와 동일한 맥락으로 예전에 하던 짓을 계속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더 이상 경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제는 권력(power)이 핵심이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오로지 권력에만 관심이 있다. 오로지 권력의 축적만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을 실질적으로 위험하다. 논리, 연구, 타협, 대화, 토론이 없다. 서로 다른 정신세계가 서로 만나 합의하는 과정은 있을 수 없다. 오로지 권력만이 있을 뿐.

1970년대부터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이름하에 정체성 정치가 대학들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인문학 분야의 전부와 사회과학 분야의 상당 부분을 장악했다.

우리는 서양문명의 근간을 파괴하려는 목적의 포스트모던 좌파 사상가들에게 공공연하게 자금을 지원해 온 셈이다. 이것은 착각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이미 이러한 목적을 인정하고 있다. 이들의 철학은 상당 부분 프랑스 철학자 자끄 데리다(Jacques Derrida)의 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 데리다는 현재 급진좌파에서 추구하는 반(反)서양철학을 가장 명료하게 확립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급진적인 포스트모더니즘을 추종하는 자들은 인종, 성적취향, 성별 등 집단정체성을 가장 중요시하는데, 이들이 관료조직의 중하위 계층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공화당이 집권한 미국에서조차 많은 정부조직의 상층부에 포스트모더니스트의 행태를 보이는 인사들이 있음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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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반달가면

 

반달가면 이글루에서 백업 - http://bahndal.egloos.com/607816 (2017.11.27)

사실 이 세상에 열등감이 없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세상이 완벽하지 못하고, 부모와 형제가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에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마음의 상처를 지니게 된다. 다만, 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열등감의 존재를 인정하고 직시하느냐, 아니면 열등감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거나 마치 자신에겐 없는 척 숨기면서 막상 그 열등감을 자극하는 사건이 생길 때마다 거품을 물고 펄펄 뛰며 분노하느냐, 그런 차이가 있을 뿐이다.

여기에 써 보는 갑돌이의 이야기는, 일부는 나 자신에 대한 고백이고 일부는 주변에 있던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한 결과다.


분노하는 갑돌이의 사례

갑돌이는 자신의 열등감을 인정하지 못했다. 아니, 아예 그런 쪽으로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대학 가려고 시험공부하기도 바쁜데 자신의 마음에 대해 돌아볼 여유는 사치였다.

그래도 밤낮으로 공부한 보람이 있어, 갑돌이는 대학에 들어갔다. 공과대학이라서 한 학기에 과목당 시험을 최소한 세번씩 봐야 하고 숙제도 많고 학점도 짜게 주는 것이 문제였지만 그래도 입시준비하던 고등학교 생활에 비하면 낙원이라고 해야 할 만했다. 늦잠도 마음대로 잘 수 있었고,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워도, 가끔 수업을 제끼고 학교 잔디밭에서 빈둥거려도 누구 하나 간섭하지 않았다. 이 얼마나 자유로운 인생인가!

그런데도 갑돌이는 삶이 괴로웠다. 자신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이 생길 때마다, 그러한 일이 벌어지는 환경과 그 환경 속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 분노했기 때문이다. 갑돌이는 자신이 착하고 괜찮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이 속속들이 썪어 있는 부조리한 곳이기 때문에 이런 괴로움과 분노를 지니고 살게 되었다고 여겼다. 이 부조리한 세상에서 자신과 달리 즐겁게 사는 사람들, 소위 잘 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짜증이 치밀었다.

어쨌든 그런 식으로 살던 중에, 열등감과 피해의식을 마음대로 분출할 수 있게 만드는 굉장한 마약을 만나게 되었다. 마음속에 담긴 화를 어디든 쏟아붓고 싶어 혈안이 되어 있던 갑돌이에게 어둠속 한줄기 빛 내지는 가뭄끝의 단비 같은 눈부신 단어가 나타났으니, 그것은 바로 "정의(正義)"다.

"정의의 이름으로 저 자들을 처단하라!" 이 얼마나 달콤한 명제인가! 아무런 죄책감 없이 이렇게 남을 괴롭히고 파괴할 수 있는 마법의 문장이 존재할 줄이야! 사안에 따라 표현과 내용은 각양각색이지만 내재되어 있는 명제는 언제나 동일했다. "정의의 이름으로 저 자들을 처단하라!"

어디 그뿐인가? 막상 "정의"의 편에 서고 보니, 주변에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며 이를 갈고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더라는 것이다. 여태껏 이걸 왜 몰랐을까? 갑돌이는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증오와 분노가 불의에 맞서 투쟁하기 위한 성스럽고 위대한 감정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오오 동지들이여!

정의라는 단어는 얼마나 위대한가! 갑돌이는 소위 "불의의 편에 서 있는 자들"에 대한 욕설과 비방과 폭력을 행하면서도 죄책감은 고사하고 오히려 신세계가 열리는 듯한 해방감을 경험했다. 자신이 그동안 왜 그렇게 괴로워 하면서 분노를 키우며 살아왔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바로 저들이 세상을 망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정의의 편에 서서 동지들과 함께 당당하게 앞으로 나선 갑돌이는 말싸움에서도 천하무적이었다. "너희들의 주장은 비현실적이고 실현되면 오히려 수많은 해악을 가져온다"고 말하는 자들에게 떼거리로 달려 들어 "부조리로 얼룩진 현실에 아첨하는 속물근성의 쓰레기들"이라고 윽박지르며 욕을 한바가지 해주면 된다. "너희들과 의논하며 해답을 찾을 이유가 없다. 너희는 불의의 편에 있으니까!" 이러면서 아예 논의 자체를 거절하며 줄기차게 욕을 해대면 상대는 결국 입을 다물고 피해 버렸다. 그때의 그 우월감! 승리감! 그래, 바로 이거였어!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삶의 의미! 인생의 소명! 바로 이것이로구나! 저들을 괴롭힐 수만 있다면, 비열한 거짓말과 속임수조차 성스럽고 위대해 보였다. 왜냐고? 저들은 정정당당하게 대우해 줄 가치조차 없는 쓰레기들이니까!

그렇다고 인생이 엄청나게 행복해진 것은 아니고, 사실은 여전히 분노와 증오에 휩싸여 살고 있었다. 하지만 불의의 세력을 짓밟고 괴롭히는 그 순간의 짜릿함은 도저히 끊을 수 없는 마약과 같았기에, 갑돌이는 드디어 삶의 방향을 제대로 잡았다고 굳게 믿었다. 이 세상은 단순한 대결구도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상호의존성 투성이라는 증거들은 "현실과 타협하지 않겠다"고 되뇌이며 애써 외면했다.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서도 그렇게 분노의 감정을 활활 불태워가면서 확신에 찬 인생을 살던 갑돌이가 자신의 가치관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한 것은 강아지 한마리를 키우면서 부터다. 어쩌다 보니 강아지를 맡아 키울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는데, 귀찮을 것 같긴 했지만 강아지가 나름 귀여워 보이기도 해서 별 생각 없이 일단 키워 보기로 했다.

갑돌이는 강아지를 키우면서 자신의 행동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챘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갑돌이는 강아지에게까지도 분노와 증오를 분출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화를 내던 어느 순간에 문득 자기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를 관찰해 보니 참으로 놀라운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매일 괴롭힌 것은 아니다. 잘해줄 때도 많았다. 그런데 뭔가 강아지가 말을 안 듣거나 하면, 희한하게도 불의의 세력을 단죄할 때와 동일한 종류의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이런 상황을 가끔씩 인지할 때마다 마음 한구석에서 뭔가 찜찜한 느낌이 있기는 했지만, 왜 이런 일이 생기는지 그 원인이 분명하게 떠오르지도 않았고 조금 지나면 잊어버리고 했기 때문에 강아지를 대하는 행동양식을 고치지는 못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언제부터인가 강아지는 갑돌이를 슬슬 피하고 있었다.

어느날, 갑돌이는 생각에 잠겼다. 강아지는 불의의 세력에 속해 있는가? 아니다. 말 못하는 동물이니 정의나 불의를 논할 대상이 아니다. 그런데 왜 나는 이렇게 분노하고 있는가? 강아지가 구체적으로 무슨 잘못을 했기에 나는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가?

이 문제는 꽤 오랫동안 갑돌이를 괴롭혔는데, 한참을 고민하던 끝에 갑돌이가 내린 결론은 아래와 같다.

내가 그토록 분노했던 이유는 세상이 부조리했기 때문이 아니라 열등감과 피해의식에 절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순진하고 세상 모르던 어린 시절에 부모와 형제와 친구들로부터 부당한 대접을 받거나 괴롭힘을 당하면서 쌓인 억울한 감정이 아직도 여전히 마음속에 그대로 쌓여 있었다. 나는 이들에게 의존해서 살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또는 보복이 두려웠기 때문에 이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거나 맞서 싸우지 못하고 그냥 꾹 참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그냥 참을 수밖에 없는 나약한 자신이 한심하고 혐오스러웠고 그래서 너무나 화가 났다. 이런 상처들이 모여 열등감이 되고 피해의식이 되어 어느새 마음속에 자리를 잡았다. 겉으로는 자신의 분노가 더 나은 세상,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위대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강변해 왔지만 사실은 개인적인 열등감과 피해의식이 이 모든 분노의 원천이었다.

갑돌이는 이렇게 결론내렸다. "내가 그렇게까지 분노했던 이유는, 세상이 부조리했기 때문이 아니라, 어린 시절의 상처들 때문에 이미 처음부터 화가 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을 담담하게 인정하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이걸 인정하면 마치 내가 그만큼 못난 사람임을 자인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걸 인정해 버리면, 그동안 "불의에 맞선 투쟁"이라는 이름으로 아무런 거리낌이나 죄책감 없이 자행해 왔던 비난과 폭력이 다 잘못이라는 얘기가 된다. 한마디로 그동안 인생을 잘못 살았다고 인정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 말이 쉽지 대체 어떻게 이런 것을 인정한단 말이냐!

마음의 갈피를 못 잡고 혼란에 빠진 나날들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세상의 부조리함"이 주는 괴로움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운 괴로움이 찾아왔다. 그냥 예전으로 다시 돌아가서 더 이상 이런 문제는 생각을 말아 버리자고 다짐해 보기도 하고, 저 망할 강아지만 아니었어도 이런 괴로움은 없었을 것이라면서 모든 것을 강아지 탓으로 돌려 보기도 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알 수 없는 이상한 자괴감만 커졌다. 입맛도 떨어지고 잠도 깊이 못자는 날이 늘었다. 예전보다 몸무게도 줄었다.

그러던 어느날, 갑돌이는 강아지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해 주었다. "멍멍아. 지금까지 내가 너에게 화를 내고 괴롭혔던 이유는 네가 잘못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이미 화가 나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었어. 너의 잘못이 아니야. 그동안 내가 너무 큰 잘못을 했다. 미안해."

갑돌이가 열등감을 완전히 극복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최소한 정의의 이름으로 남을 괴롭히는 행위는 그만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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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반달가면